정의기억재단

그녀들의 외침

김상희 할머니 삶 (1922~2005)

나의 일생은 열다섯의 그 순간부터
죽은 목숨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상희 할머니 삶 (1922~2005)

나의 일생은 열다섯의 그 순간부터 죽은 목숨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상희 할머니는 경남 밀양에서 1922년 출생하였습니다. 1936년 15세 때 친구와 대구의 사진관에서 사진을 찾아오다가 형사들에게 강제로 붙잡혀 트럭을 타고 대구역으로 연행되셨습니다.
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대련까지 갔으며, 다시 배를 타고 상해로 이동하였습다. 상해에서 기차로 소주의 위안소로 이동한 뒤 일본군‘위안부’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이후 소주와 남경에서 5년 동안 그 후 2년 동안은 싱가포르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였습니다. 위안소에 있는 동안 세 번의 자살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1946년(25세) 봄에 부산항으로 귀국하여 가족과 만났으나 ‘위안부’ 생활을 숨기며 결혼을 회피하였고 나이가 들어 집에서 나와 남의 집에서 식모와 파출부생활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셨습니다.
1992년(71세) 한국정부에 ‘위안부’로 등록한 후 국내외 증언집회와 수요시위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1996년 일본 이타가키 당시 자민당 참의원이 “위안부는 없었다”고 망언을 내뱉자 일본 의원회관까지 직접 찾아가 “내가 역사의 산 증인”이라며 당당히 맞서기도 하였습니다. 평생 ‘위안부’였다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결혼하지 못하고 홀로 사셨으며, 각종 만성질환으로 고생하시다 2005년(84세) 1월 지병으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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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열다섯 살이었지요. 당시는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은 후 며칠 후 찾으러 가야 하기 때문에 친구랑 같이 사진관에 들러 사진을 찾고 나오는데 갑자기 세 명이나 괴청년이 달려들어 붙들어서 미리 준비한 트럭에 우리를 태웠습니다. 우리가 탔을 땐 이미 그곳엔 여러 명이 있었으나 어두워서 몇 명인지는 분간할 수는 없었습니다. 곧 트럭은 떠났으나 워낙 겁에 질려 우느라고, 사방이 눈이 와서 하얗게 밝았지만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낙심해서 이제는 죽으려고 해서 크레졸 한 병을 마신 적도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면 다시 병원의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후 일주일 정도 병원에 있었는데 잠시 있다가 다시 그러한 생활로 되돌아가야 한다라고 하니까 이제는 정말로 그런 일이 싫어서 싫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해군력이 완전히 궤멸했다고 해서 군인들이 흉표해지고 그 분노를 여자들에게 터뜨리고 몹시 취하고는 못살게 굴었다. 형편없어요. 한 마디라도 말대꾸하면 그것에 대하여 폭력을 휘두릅니다. 엉망이지요. 전쟁에 이기면 매우 기분이 좋고 지면 마구 괴롭히는 거예요. 모두 겁내고 말 한마디도 못하는데 말을 하더라도 한 마디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이유로 때리거나 칼로 쳐요.”

“이 몸으로 결혼한다는 것이 죄스러워 서울로 돈 벌러 간다며 집을 나와 남의 집 식모로 12년을 살다가 허릴 다쳐 그만 두고 지금까지 작은 월셋방에서 혼자 치료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의 일생은 열다섯의 그 순간부터 죽은 목숨과 마찬가지로 사람답게 변변히 살아보지도 못한 채 이렇게 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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