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기억재단

그녀들의 외침

김학순 할머니 삶 (1924~1997)

내 청춘을 돌려주십시오.

김학순 할머니 삶 (1924~1997)

내 청춘을 돌려주십시오.

1924년 중국 길림에서 태어난 김학순 할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평양으로 와서 살았습니다. 14세 때 어머니가 재혼하셨고, 15세에 기생권번에 다니며 춤과 판소리 등을 2년 정도 배워 17세(1941년)에 졸업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 영업을 할 수 없었으므로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양아버지는 권번을 함께 다니던 언니도 같이 데리고 북경으로 갔습니다.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군인에 의해 트럭에 태워졌고 양아버지와는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길로 북경 근처 철벽진으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도망갈 기회만 노리던 할머니는 끌려간 지 넉 달 만에 한국인 남자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위안소에서 탈출하였고, 그와 살림을 차린 뒤 상해에 정착하였습니다.
상해에서 딸과 아들을 낳은 뒤 해방을 맞았고 1946년 6월에 광복군을 따라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이후 딸과 남편, 아들이 차례로 사망하였고 홀로 식모생활과 새마을취로사업 등으로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할머니는 일본군‘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전면 부인하는 일본 정부를 보다 못해 1991년(68세) 8월 최초로 자신이 일본군‘위안부’였음을 공식 발표하였습니다.
이후 일본군‘위안부’문제의 해결과 일본정부의 공식사죄를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다 1997년 12월 7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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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은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끝났습니다. 그때 일은 말로 다 못해요. 일본군의 배설물을 받아내는 공중변소 같은 인간 이하의 생활이었기에 생각을 안해야지. 군인들이 마구 달려들 때면..... 입술을 깨물고, 도망가려다 끌려오고..... 생각하면 답답하고 몸서리쳐집니다. 하늘을 바로보지 못할 부끄러운 인생이었지만은... 그러나 지금도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은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해서입니다.”

“언젠가는 이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맘을 항상 품어 왔습니다. TV에서 일장기만 보아도 울렁거리고 정신대 정자만 들어도 숨이 콱 막혀서 꼭 한을 풀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은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해서입니다. 내 청춘을 돌려주십시오.”

“제가 자랑스러울 것 하나 없는 과거사를 들추고 나선 게 돈 몇 푼 더 받기 위해서였겠습니까? 일본에서 국민기금을 모아올 정도로 성의를 보였으면 대충 마무리지을 만한데 뭘 자꾸 버티느냐는 식의 일본 쪽 시각을 정말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법적 배상금이지 위로금이 아닙니다.”

“저는 정부에서 준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고 한 달에 25만원의 지원금도 받고 있어 따로 돈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제 주검을 거두어줄 가족도 없어 수의도 미리 다 장만해뒀고, 망향의 동산에 제 한 몸 묻을 자리도 구해뒀습니다. 이런 제게 무슨 돈이 필요합니까.”

“그동안 말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밝혀져야 할 ‘역사적 사실’이기에 털어놓기로 했습니다. 차라리 속이 후련합니다. 지금도 ‘일장기’만 보면 억울하고, 가슴이 울렁울렁합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요즘도 일본이 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나 죽기 생전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 할려고 그래서 내가 나서기 시작했어요. 8월 14일에 방송국 사람들 모아놓고 이야기 한거예요. 너무나 원통하고 분해서. 우리 한국여성들 정신 차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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