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기억재단

그녀들의 외침

황금주 할머니 삶 (1922~2013)

목숨 건져 나가야지,
그 생각뿐이었다구.

황금주 할머니 삶 (1922~2013)

목숨 건져 나가야지, 그 생각뿐이었다구.

황금주 할머니는 1922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3세 때에 함흥의 부잣집에 양녀로 들어가 양모의 배려로 17살부터 2년 동안 함성여자강습소라는 곳에서 일본어와 산수를 배웠습니다.
20세인 1941년에 동네반장이 일본 군수공장에서 3년 계약으로 일하면 큰돈을 벌 수 있는데, 한 집에서 한 명은 가야한다고 하여 양모가 누굴 보낼지 괴로워하고 있는걸 보고 황금주는 자신이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장은 거짓말이었고, 만주 지린성 인근의 군부대에서 5년간 ‘위안부’ 생활을 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그녀는 서울로 귀국하였고, 그 때부터 홀로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면서 공장생활, 식당 일 등으로 생계를 꾸려왔습니다.
1992년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였다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할머니도 힘을 얻어 신고하였다. 이후 1992년 정대협 대표단과 함께 유엔인권위원회 소위원회에 참석하여 증언하는 등 ‘위안부’ 문제해결 운동의 초기에 등록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수요시위는 물론 국내외 증언집회에도 참석하여 ‘위안부’의 참상을 알리고 일본정부의 사죄 없는 태도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수요집회에서 일본대사관을 향하여 거침없이 화를 내시고 욕을 퍼붓기도 하였습니다. 2013년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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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는 검은 종이 커튼 때문에 밖을 내다볼 수 없었고 불도 켜지 않아 깜깜 절벽이었어. 그러나 움직이는 방향이 북쪽임을 알 수 있었지. 서울 방향으로 가는 줄만 알았는데 기차가 자꾸자꾸 북쪽으로 가는 게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물어볼 수도 없었어.”

“그놈이 하는 말이 니가 지금서부터 내 말을 잘 들어야지 잘 안 들으면 죽고도 남는다. 어머나 저 개새끼가 내가 지 말을 안 들으면 죽고도 남는다니 내가 무슨 일을 해서 죽고도 남을 일을 했나 하고 벌벌벌벌 떨고서 이러고 떨고 있는 거야. 겁이 나서 추워서 떠는 게 아니라 겁이 나서 떠는 거야 벌벌벌 떨고 있으니까 그 책상에다가 볼펜을 이렇게 놓더니 와 거기서 오더니 니 옷 벗어라 이거야.”

“목숨 건져 나가야지, 그 생각뿐이었다구. 한두 달만 지나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게 돼. 만주가 그런 곳이야.”

“우리 대한민국정부는 안즉까지도 일본놈들 한테 매달려서 지랄한다고 일본 놈 말이라면 꺼뻑 돼져 그 왜정 때 그만큼 저걸 했으면 당당한 기운이 있어야 할 텐데 없어, 지금까지도.”

“나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지만 역사왜곡만은 절대 안 돼. 내 몸이 부서지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사죄를 받아내고 말테야. 내가 두 눈 뜨고 살아 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늘 억울한 마음으로 살았어. 그 동안 몇 번이고 이 일을 정부에 알리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지. 그런데 작년(1991년) 11월, 밤 열 시에 텔레비전에서 김학순 씨가 증언하는 것을 보았지. 다음 날 아침에 텔레비전에서 본 김씨 전화번호로 전화하여 만났어. 김씨가 가르쳐 주어 신고했지. 씨값을 한다고 집을 나왔는데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어. 지금부터라도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남은 인생을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다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것이 바람이야.”

“우리 정부는 무슨 기념식 때 말이나 그럴 듯하게 할 뿐 아무런 문제해결 노력이 없었어. 시간을 끌면서 우리가 다 죽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

“돈 다 필요 없어. 더러운 돈 받아 뭐해? 진정으로 사죄하라 이거야. 내 청춘 돌려놓으라 이거야. 일본 정부가 납득할 수 있는 사죄를 하는 그날까지 우리들의 시위는 1,000회, 2,000회 계속될 것이야. 일본이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하는 게 최우선이야. 그 전에는 내가 억울해서 눈을 감을 수가 없어.”

“이렇게 해 가지고 역사에 뭘 남길 거야? 우리들 다 죽고 나면 그땐 어떻게 할 거냐구? 죽도록 사과해도 시원찮은 판에 이러고 있으니 우리가 억울하고 서러워서 어떻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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