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기억재단

그녀들의 외침

김순덕 할머니 삶 (1921~2004)

일본도 나쁘지만 그 앞잡이 짓을 한
조선 사람이 더 미워.

김순덕 할머니 삶 (1921~2004)

일본도 나쁘지만 그 앞잡이 짓을 한 조선 사람이 더 미워.

김순덕 할머니는 1921년 경남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일가족이 큰아버지 댁에서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아가다가 아버지가 일본순사에게 잡혀가 모진 매끝에 돌아가셨습니다.
더욱 살기 어려워져 12세 때 남의집살이를 하다가 16세에 다시 집으로 돌아 온 후, 17세 되던 해(1937년) 일본공장에서 일할 여공을 모집한다는 소리에 따라나섰다가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군북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고, 부산에서 큰 배를 타고 나가사키로 갔으며, 다시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 상해였습니다.
상해의 위안소에서 부대를 따라다니며 ‘위안부’ 생활을 하였고, 남경의 위안소에 있다가 일본군 장교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후 서울로 올라와 여관, 공장, 구멍가게를 하다가 자식과 처가 있는 사람을 만나 아들과 딸을 낳았고, 본처 아이들까지 키우며 살았습니다.
1992년(72세) 일본군‘위안부’로 등록한 뒤 나눔의 집에서 살며 그림으로 위안소 생활을 표현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위안부’ 생활로 얻은 방광염, 자궁질환, 정신불안 등으로 평생 고생하셨으나 국내외 많은 증언 집회에 참석해 일본군‘위안부’ 피해의 실상을 알리며, 매주 수요시위에 빠지지 않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 2004년(84세) 뇌출혈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

“낯선 곳에 산도 건너 물도 건너 남의 나라로 갔으니까 내가 내 나라로 돌아갈 수가 있을까 없을까 항상 그것만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거지. 죽을 궁리만 하는 사람이 어째 그 생각을 안 하겠어. 항상 매일같이 자고 나도 그 생각, 자면서도 그 생각, 고향으로 돌아갈 그 생각뿐이었지.”

“아프고 괴로울 때는 죽으려고도 해보았지만 죽지 못했어. 강물에 뛰어들려고도 했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려고도 했고, 차에 뛰어들려고도 했지만 차마 못하겠더라고. 고향의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저리고... 도망가려 해도 어디가 어디인지 몰라서 갈 수도 없었어.”

“텔레비전에서 김학순 씨의 증언과 정신대에 관한 여러 프로를 봤어. 지금까지 원통하고 분한 것을 혼자 가슴에 묻어 두었는데 그것을 보고 밤잠을 못 자게 된 거야.…방송국을 찾아가서 말하니 정대협 전화번호를 알려줘. 다음날 파출소에 가서 도움을 받아 정대협에 신고했지. 신고하고 나서 일주일간 못 잔 잠을 잤어. 할 말을 하고 나니 한이 반은 풀린 것 같애.”

“일본 자기네들은 우리 한국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일본 자기네만 사람인가. 자기네는 열 몇 사람 가지고도 이러고저러고 말이 많잖아. 일본에 사람들 이북에서 잡아갔다고 납치해 갔다고 자기네는 우리 한국에 처녀들을 몇 만 명도 아니고 몇 십만 명이라는 숫자를 데리고 갔다고 그래서 죽은 사람이 몇 십만 명인지 알지도 모르는 입장이라고. 자기네 식구는 열 몇 식구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데. 우리 정신대 할머니는 사람이 아니고 짐짝인가.”

“입으로만 용서해 달라고 했지. 우리는 입으로만 용서해 달라는 게 아니고 서류상으로 몇 천대 만대 내려가도 우리가 법적으로 배상하고 또 사죄하고 그렇게 명령을 내려서 그렇게 데려간 사람을 처벌을 해라. 우리 할머니들은 그렇게 10년이 넘도록 싸워 오는 거야. 그래도 아직까지도 해결이 안 난거라고.”

“일본도 나쁘지만 그 앞잡이짓을 한 조선 사람이 더 미워. 한국정부에 할 말이 많어. 한국정부도 우리들에게 보상해 줘야 해.”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