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기억재단

그녀들의 외침

강순애 할머니 삶 (1928~2005)

50여년 가슴에 간직한 얘기를
털어놓고 나니 속이 후련하더라구.

강순애 할머니 삶 (1928~2005)

50여년 가슴에 간직한 얘기를 털어놓고 나니 속이 후련하더라구.

강순애 할머니는 1928년 일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열네 살에 경남 마산으로 이사했으나 집안이 어려워 학교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1941년(14세) 처녀들을 잡아간다고 하여 화장막에 숨어 있었으나 배급을 타려고 내려왔다. 배급을 탄 후 집으로 헌병이 찾아와 강제로 연행되어 시모노세키와 히로시마에 있는 부대로 이동하여 밀감밭에서 3개월간 일하였습니다. 다시 남양군도 파라오 섬으로 이동하는 중 배가 폭격당해 무릎에 부상을 입었고 이후 여러 섬을 끌려 다니며 ‘위안부’ 생활을 했고, 공습을 피해 다니며 온갖 고생을 하였습니다.
해방 후 1946년(19세)에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으로 귀국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귀국 후에는 위안소에서 하도 맞아서 거의 다 빠진 이를 해 넣었고, 진통제도 계속 먹어야 했습니다. 또한 어머니와 동생 내외와 살면서 ‘위안부’ 경험을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독신으로 공장을 다니며 생활하였고 1962년(35세)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여 홀로 살았습니다, 49살에 자살하려고 한강에 뛰어들었으나 그때 구해준 남자와 서로 도우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와 혼인신고를 하였으며, 1992년(65세) 남편이 사망한 후 일본군‘위안부’로 등록하였습니다. 파라오에서 다친 다리가 좋지 않고 많은 후유증으로 고생하였으며 부천의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사시다 2005년 4월(78세), 많은 한을 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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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때(1940년)부터 어린 여자와 처녀들을 또 잡으러 왔다는 소문이 들려서 쌀 뒤주 안에 숨었어. 마산 완월동에 있는 애들이 많이 잡혀서 만주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있었지. 시집을 가면 안 잡아간다고 해서 당시에 여자들은 영감한테도 시집가고 병신한테도 시집갔다고 하더군.”

“부엌에서 밀을 볶고 있는데 다다다닥 구둣소리가 났어. 문을 발로 걷어차면서 순사 한 명과 헌병 세 명이 뛰어들어 왔지. 모두 누런 군복을 입고 각반을 차고 있었고 헌병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헌병 두 명이 양쪽에서 팔목을 잡고 뭐 물어볼 것이 있다고 잠깐 가자고 했어. 방에 있던 아버지가 여기서 물어보지 왜 강제로 데려가느냐고 물었더니 헌병이 욕을 하면서 갔다 오면 알지 않느냐고 했어.”

“밤이나 낮이나 공습으로 퍼부어대는 그 곳에서 살아나온 것이 기적이야. … 하도 언니들을 죽여대서 하루는 밤에 우리들이 흰 수건을 가지고 나가서 공습하러 온 비행기를 향해 흔들면서 장교들 있는 여기를 폭격해 달라고 신호를 보낸 적도 있지. 그런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는 장독에 물 세 공기를 떠놓고 내가 간 동쪽을 보고 절을 하고 계셨어. 정월 초하루라서 내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게지. 내가 들어가 “엄마”라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어. “엄마”하고 또 불러도. 다시 내가 “엄마 나 왔어” 했더니 어머니는 뒤도 못 돌아보고 까무라쳐 버리셨지. … 어머니와 동생 내외와 살면서 남양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지 않았어. 어머니는 내가 당한 것을 들었으면 아마 목을 매서 죽으셨을 것이야.”

“제일 마음이 아픈 것은 딸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야. 딸이라면 내가 외로울 때 심정을 이해해줄 것 같아서 아들이라면 이해를 못할 것 같아. … 50여년 가슴에 간직한 얘기를 털어놓고 나니 배가 붓는 듯한 증상은 없어졌고 속이 후련하더라구. 이제 한만 풀고 죽으면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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