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기억재단

그녀들의 외침

윤두리 할머니 삶 (1928~2008)

남의 일생을 이렇게 망쳐 놓고
일본은 왜 이제 와서 발뺌을 하나?

윤두리 할머니 삶 (1928~2008)

남의 일생을 이렇게 망쳐 놓고 일본은 왜 이제 와서 발뺌을 하나?

윤두리 할머니는 1928년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1943년(16세) 초순경 부산에서 공장을 다니던 중 퇴근길에 경찰에 의해 경찰서로 연행된 후 곧바로 부산 영도 제1위안소에서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하였습니다.
집을 지척에 두고 위안소에 갇혀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위안소에서 풀려날 수 있었고, 차마 빈 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어 식당에서 1년여 일을 한 후 돌아갔으나 어려운 형편과 위안소 생활로 인한 심적, 육체적 고통 등으로 힘든 나날을 보냈고, 독신으로 살면서 동생들을 키우며 살았습니다. 27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는데, 할머니는 그것이 본인 때문에 병이 생겨 돌아가셨다며 평생을 괴로워하셨습니다.
1992년 일본군‘위안부’로 등록하였고, 일생을 망쳐놓고 발뺌을 하는 일본을 향해 분노하셨고. 일본정부의 기만적인 ‘국민기금’을 거부하였고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원하였습니다. 할머니는 2008년 5월 28일, 지병으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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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갔다 오다가 붙들렸는데, 오는데 무엇이 어이어이 하면서 자꾸 불러요. 그래서 내 딴에는 누구 부르나 난 돌아도 안 보고 집으로 오는 거예요. 그랬더니만 뒤에 와서 순경이 등어리를 딱 잡아 댕겨버리더라.”

“그 새끼들 참 인정사정없는 놈 들 이예요. 세상에 때리면 그냥 몽둥이로 때리지 총대 그게 얼마나 무거워요? 그걸로 거꾸로 들고 엎드려 뻗혀 해 가지고 맞는데 딴 애들은 두 대를 맞고 하나는 꼬부라지고 하나는 석대를 맞고 꼬부라지는데 나는 막 죽이라 하고 독이 올라 가지고 다섯 대를 맞고 뻗어버렸어요.”

“그곳에 있던 위안부들은 누구나 도망가려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도망을 시도하다가 두들겨 맞고 또 내가 그렇게 앓는 걸 보고는 모두 포기해서 그후로 도망을 시도한 사람은 없었다. 위안소 생활 중 즐거웠던 적은 없었다. 군인들이 안 오고 우리끼리 있을 때는 집타령하며 함께 울었다.”

“친구들이 나 서른 먹고 그럴 때는 시집가라고 선도 세 군데를 보여주고 그러더라고. 그래도 다 그래 보면 남자들 근사하게 잘 생겼는데 아구 저놈 속에는 구렁이가 얼마나 들었을까, 뭐 그 남자를 시집간다 이 생각을 하고 그 남자를 딱 볼 때는 전부 일본에 가가지고 당했던 그게 먼저 팍 떠올라 오는 거예요.”

“난 다시 태어나도 만약에 내가 정말로 공부를 많이 해가지고 정말 의사가 되가 환자들을 많이 고친다던지 그래 안 하면 수녀가 되가지고 살고 싶지, 가뜩에 남자들한테 가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은 없어. 자식 놓고 사랑 받고... 그거는 그런 생각이 없어.”

“남의 일생을 이렇게 망쳐 놓고 일본은 이제 와서 발뺌을 하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시집도 못 가게 남의 일생을 망쳐놓고 입에 발린 사과나 한다니 말이나 되는가? 내가 눈감고 죽기 전에는 내가 당한 일을 잊을 수 없다. 아니 죽어서도 못 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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