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기억재단

그녀들의 외침

안점순 할머니 삶 (1928~ 현재)

울기도 많이 울고,
노다지 눈물로 세월을 보냈지.

안점순 할머니 삶 (1928~ 현재)

울기도 많이 울고, 노다지 눈물로 세월을 보냈지.

1928년 서울 마포에서 태어나신 할머니는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941년(14세) 동네에서 방앗간 앞으로 모이라는 방송으로 어쩔수 없이 방앗간에 갔고 거기서 쌀을 재는 저울에 무게를 달았고 바로 트럭에 태웠졌습니다. 그 후 기차를 타고 중국 내몽고 지역으로 이동하여 일본군‘위안부’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위안소에서 나와 수개월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에서 떠돌이 생할을 하다 1946년에 중국 천진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귀국한 뒤 고향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의 정성으로 몸을 회복하였으나 6.25 한국전쟁으로 대구로 피난을 갔다. 이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대구 왜관에서 식당을 하며 살았고, 1992년(65세)에 조카가 있는 수원으로 이주하셨습니다. 수원에서 취로사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다 1993년에 일본군‘위안부’로 등록하였다.
현재 수원지역에 사시며 수원평화나비와 함께 지역에서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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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놈들헌테 내가 당한 걸 생각을 허면, 내 참 그 아까운 청춘을, 이 날 이 때까지 그 놈들 땜에 시집도 못가고 그랬으니. 인제 남 결혼해서 이러는 걸 보면 속이 아프지. 나는 그런 일을 당했는디 청춘이 다 지나가 버리고.”

“해방이 되었고, 거기에서 돌아 왔어도 아직도 어리잖아. 결혼이라든가 남자라든가 이런 거는 생각하기도 싫었어. 한 번은 동네 아줌마가 소개로 해서 양복집 아들을 선을 봤는데, 그 남자가 내가 좋았던지 매일 아침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너무 너무 보기 싫었어. 남자라면 진저리가 쳐졌거든. 무조건 싫더라고, 징그럽더라고. 결혼이라든가 남자라든가 이런 거는 생각하기도 싫었어.”

“동네에서 방송을 했는데, 복사골 큰 방앗간 앞으로 모이라고 하더라고. 몇 살까지 여자들 다 여기로 나와 봐라 하는 식을 했지. 그렇게들 나오라고 하니까 부모네들이 따라 나왔었지. 왜 그러나 하고. 그래서 나갔는디 동네 여자들을 나래비로(한 줄로) 줄을 세워놓고는 쌀가마 무게를 재는 저울에 무게를 달았어. 거기에서 무게가 좀 나가는 실한 여자들은 바로 트럭에 싣더라고. 총을 찬 군인도 있고, 한국사람도 있었어. 일본군인이야 여럿이 있었지. 민간인도 있었고, 그것들이 다 차 타라고 하고, 끌어올리고 그랬어.”

“아침에는 조금 한가하고, 그 나머지는 낮도 밤도 없었어. 아침밥 먹자마자부터 들이닥쳤지. 그 잡놈의 새끼들이 그 죄를 다 어떻게 받을지. 그 당시 있었던 놈들은 다 죽었을거야.”

“지금은 담배가 남편이고 자식이야. 지금까지 그랬어. 담배가 없으면 낙이 없어. 그 때, 열 여섯 살 때부터 그 언니한테 담배를 배워서, 이렇게 담배를 못 끊고 있네. 울기도 많이 울고, 집서러움도 많이 받고, 노다지 눈물로 세월을 보냈지. 그래도 뭐 ‘힘든 것? 뭐 사람 사는 게 다 그런거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다 삼켰지 뭐.”

“참 그래도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졌지. 이렇게 좋은 날이 올지 몰랐어. 이렇게 수고해 주니까 너무나 고마워. 그 당시만 해도 누가 한 사람 나서서 한마디 말해주는 사람 없고. 참 시국을 잘못 만나서 전장도 여러 번 겪으고 고생도 많이 했고, 우리가 참. 어휴 저놈들이 저희들이 스스로 반성을 해야 되는디, 저렇게 지랄을 하니 … 그놈들 웬수를 어떻게 해서 갚겠노, 빨리 해결을 잘 지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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