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기억재단

그녀들의 외침

이용수 할머니 삶 (1928~ 현재)

잘못된 역사는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용수 할머니 삶 (1928~ 현재)

잘못된 역사는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1928년 대구에서 5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난 할머니는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아홉 살 때부터 낮에는 일본사람이 운영하는 조면 공장에 다니며 저녁에는 야학에서 일본어를 배웠습니다.
17세 때(1944년) 취직시켜준다는 일본인의 말에 속아 친구와 함께 대만에 있는 위안소로 연행되었습니다.
가미가제 독코타이 부대 군인들이 대다수인 대만 신죽 근처 위안소에서 군인들을 따라서 공습을 피해 다니며 ‘위안부’ 생활을 하였습니다.
해방 후 부산으로 귀국하여 고향집으로 돌아온 뒤 식당 종업원, 해수욕장에서의 장사, 포장마차, 보험 판매원 등을 하며 생활하였습니다.
1992년 ‘위안부’피해자 신고를 한 뒤, 일본정부를 이기기 위해서는 법을 알아야 한다면서 경북대학교 법학과 명예학생으로 학업을 하였습니다. 대구에서 거주하면서 서울 일본대사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수요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국내외 증언활동과 일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각종 시위와 행사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07년에는 미국 하원 본회의에 일본군‘위안부’결의안(HR121) 상정을 위한 미국캠페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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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분하고 가슴이 떨리지만 그때는 그걸 몰랐습니다. 무섭고 겁이 나서 군인들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어느 날은 바다에 빠져죽으려고 배의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는데 뛰어내려 죽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시퍼런 물이 거칠게 파도치는 것을 내려다보니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차마 몸을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서는 조선말을 쓸 수가 없었어요. 조선말을 썼다가는 주인에게 얻어맞았죠. 그런데 어느 날, 생전 말도 안 하던 먼저 온 여자 하나가 ‘나도 조선 여자다’ 하며 조선말로 전쟁이 끝났다고 말해주었어요.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 울었어요. 그 언니는 “어떻게든지 꼭 살아서 조선으로 돌아가거라” 하며 손을 꼭 잡아주었죠.”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는데, 우리 젊은이들에게 그 일을 다시 겪게 하다니요. 파병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잠도 못 이루겠습니다.”

“잘못된 역사는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나와 같은 할머니들이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있는 한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 앞에서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처음 이 사실을 밝히기까지 정말 힘들었어요. 많은 용기가 필요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당당한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요. 우리 정부도 피해자에 대한 문제를 일본에 당당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내 죄는 대한민국의 딸로 태어난 것밖에 없는데 아직까지 일본은커녕 조국에게도 위로 한 번 받지 못했어요.”

“난 절대 빨리 죽지 않을 거야. 일본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잘못을 알면서도 절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어. 많은 할머니들이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 있지만 배상은 물론 사죄도 아직 못 받았지.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 배상을 받기 전까지는 결코 눈을 감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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